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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과 황해로 바라본 남북한 그리고 조선족의 관계

  백 년 전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그들의 나라는 너무나 가난해져서 사람들은 이웃 나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들의 나라는 다른 나라에 의해서 강제로 합병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다시 찾겠다고 이웃 나라 국경으로 넘어가서 살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 그들의 나라는 독립을 했지만 이념이라는 질병에 걸려 두 개로 갈라지게 되었고, 원래 같은 나라의 같은 민족이었던 이들은 남과 북 그리고 이웃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나눠지게 된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조선족이라는 집단이 형단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적어보았다. 원래 한 민족이었지만 정치적 이해와 역사적 비극으로 인해 세 분류의 집단으로 나뉘어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지극히 안타깝고 가련하기만 하다. 그리고 여기 이 세 집단의 모습을 서로 다른 입장과 영화적 장르로 표현한 두 영화가 있다. 바로 황해와 두만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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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얽히기 시작한 관계

  우선 영화 두만강을 보자면 심각한 흉년과 경제난으로 인하여 많은 북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두만강을 통해 중국으로 탈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선족들은 그런 탈북자들을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도우려한다. 영화 속에 주인공인 조선족 소년 창호와 누나 순희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런 초창기 조선족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먹을 것이 없어 두만강을 넘어온 북한 소년 정진에게 따듯한 밥을 지어 먹여주고 북한에 남아 있는 정진의 동생을 위해 쌀까지 챙겨 보내는 그들의 모습은 남이 아닌 하나의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점차 탈북자들의 원하는 것이 과해지고, 그들로부터 물질적인 피해를 입기 시작하자 조선족들의 태도는 변하기시작한다. 탈북자들을 같은 피를 나눈 동포가 아닌 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 황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1990년대 연변 자치주를 포함한 동북지역은 중국의 경제성장 지역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한족이 거주하는 연안 위주의 도시들로 자본이 집중되고 도시가 성장해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연변 자치주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경제적 기반이 부족하게 되었다. 결국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선족들은 살아남기 위해 남한으로 돈을 벌기 위해 넘어간다. 그러한 조선족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은 살해되기 전에 자신을 살해하기 위해 넘어온 조선족 청년 김구남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용돈을 건네는 김승현을 통해 표현되었다. 반면 조선족들은 돈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려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남한 사회를 경험해야 했다.
 

 
 

- 문명화 비()문명화

  잠시 영화감독들의 시선을 삐딱하게 비평해본다면 그들의 영화는 가히 자신들의 속한 집단의 선입견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 두만강에서 장률 감독은 정적인 화면을 반복하면서 고요하면서 차가운 두 집단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객관성의 이면에는 은연중 북한 사람들을 낮게 보는 조선족들의 시선이 담겨져 있었다. 예를 들어 북한 소년들이 조선족 마을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며 전전하는 동안 그들의 무리 중 한명이 감기가 걸려 결국 들판 위에서 죽게 된다. 나머지 아이들은 길 위에 쓰러진 아이를 몇 번 흔들더니 너무나 태연하게 그 아이를 버리고 가버린다. 이것은 정말 본능에 충실해 오로지 먹을 것을 찾아 전전하는 야생 동물들의 모습이다. 또한 창호 가족이 한 탈북청년을 거두어 먹이고 입혔지만 그 청년은 결국 자신의 본능을 이기지 못 하고 순희를 겁탈한다. 이것이 선입견이 아닌 진실일지 모르지만 영화 프레임 속에 보이는 모습은 북한인들이 비()문명화된 이들이었다. 장률 감독의 영화 속 시선에서 탈북자들은 그야말로 동물과 같은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조선족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 한국 사람들 눈에는 그들의 모습도 가히 비()문명화되어 보인다. 영화 황해의 나홍진 감독은 스릴러 영화감독답게 항상 어둡고 자극적이며 숨 막히는 액션을 보여주고자 했다. 한국 사람들의 청부에 따라 살인청부업자를 한국으로 보내는 마적과 같은 개장수 면정학. 그리고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한국으로 간 택시운전수 김구남. 이 두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 속에 조선족들은 사람도 스스럼없이 죽이는 야만인들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모습을 그린 두만강의 북한 청년의 모습이나 자신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여주며 용돈까지 주었지만 결국 죽이려 시도한 김구남의 모급에서 관객은 인간의 동물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 권력과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 

 영화 두만강 속 조선족 마을의 모습은 남한의 자본주의적 풍요를 동경하고 그것을 따라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촌장과 용란 아주머니라는 캐릭터들이다. 용란은 마을에 유일한 두부가게 장수이자 경제적인 힘이 있는 인물로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촌장은 마을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권력 (행정적 권력)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이 두 사람은 영화가 시작되는 첫 장면에 얼어붙은 두만강 위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 정진을 함께 바라보며 다가온다. 처음에는 그들의 다정한 모습이 부부인줄 알았지만, 사실 그들의 관계는 외도였다. 아마도 두 사람이 상징하는 것이 국가권력과 자본주의라면 그들의 접근에 놀라 도망가는 창호의 모습을 그러한 현실적인 압력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멀어지고 싶어 하는 감독의 숨은 의도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황해에서도 볼 수 있다.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동업자 김승연을 죽인 조직폭력단의 두목 김태원.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생해서 살아가는 억압하는 폭력을 상징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은 김승연 의 부인과 불륜인 은행직원 김정환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죽어가는 힘없는 조선족 김구남의 모습은 장률 감독이 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 결과가 아닐까 한다.
 


 

- 현실과 욕망의 부조리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자살하는 것을 장면을 끝으로 마무리 된다. 영화 속의 세상은 지옥이었고 그곳이 존재하는 부조리와 모순은 주인공들을 비참하게 한다. 영화 두만강에서 창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온 친구 정진의 모습과 자신의 누나를 겁탈한 탈북 청년의 모습에서 보이는 상반된 결과에 괴리감을 느낀다. 좋고 나쁘다는 명확한 기준이 사라지고 결국 조선족인 자신들의 모습도 탈북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작은 소년에게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소년은 그의 할아버지가 그랬듯 이상적인 동경으로서의 북한의 모습을 그렸지만, 현실에서 만난 북한의 모습은 그것과 차이가 컸던 것이다.
 
영화 황해에서도 주인공 김구남이 자신을 사지로 내몬 배후를 알기 위해 김승연의 죽음을 조사하던 중 토막 시신으로 발견된 아내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의 아내 역시 한국에서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다 살해당한 것이다. 아내의 죽음을 접하자마자 그는 사지에 뛰어들어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한다. 결국 김승연을 죽이고 자신마저 죽음에 몰게 만든 사람이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다 죽는 김승용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구남은 이 모든 것을 사실에 연민과 허탈함을 느끼며 죽는다. 그와 그의 아내가 추구하던 욕망의 세계는 그의 가족을 파멸시켰고, 아름다운 이상으로만 바라보았던 한국의 모습은 아수라들로 가득 찬 지옥이었던 것이다.

 
 
 
- 자살 : 욕망과 현실의 중간역으로 들어가는 방법

  제목이 되는 두만강과 황해는 모두 서로 다른 두 공간 사이에 위치한 강과 바다다. 그것들은 현실과 이상 사이를 가로막음과 동시에 이어주는 곳이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영화 두만강 속에 북한은 창호 할아버지와 동네 치매 할머니가 그리는 이상의 공간이다. 그리고 영화 황해 속의 남한은 김구남의 아내와 같은 조선족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이상과 욕망의 공간이다. 사람들은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그곳을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 그곳에 머무를 수 없어서 다시 돌아온다. 두만강과 황해는 만족할 수 없는 현실과 이루고 싶은 욕망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역이며 사람들은 그 양쪽을 선택하지 못한 채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중간역에 머물기로 결정한다


 서로 다른 양측의 사이에 있는 황해와 두만강 모습은 영화 속에서 종종 상징적으로 묘사되는 자본주의적 계급 구도에 저항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그 중간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은 과거 이데올로기 시대에 제 3세계로 떠나버렸던 지식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렇지만 냉전이 종식되고 최종적으로 자본이 승리하게 되면서 남한은 남한대로의 경제적 발전의 길을 걷고, 북한은 북한대로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며, 조선족 역시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경제적 능력에 의해 원래 하나의 민족이었던 세 집단은 계층을 만들어 서로를 바라본다. 서로를 향한 이러한 반목은 결국에는 세 집단을 더욱 더 남으로 만들어가는 것일 것이다. 다시금 두 영화를 통해 씁쓸한 민족의 비극을 느낀다.